
저희 동네에 배달도 해주는 분식집이 있었습니다. 감기로 고생하던 어느 날, 식사 준비가 어려워 그 분식집으로 몇 가지 식사를 주문하였습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와 함께 중년의 아저씨가 털모자를 쓰고 배달을 오셨습니다. 아픈 제 얼굴을 보시며 “많이 아프신가 봅니다. 잘 드시고 빨리 쾌차 하세요” 하십니다. 그리고 4살 딸아이에게 “엄마 아프니까 밥 많이 먹고 혼자서도 잘 놀아야겠네.” 하십니다.
참 신기한 건 그 아저씨의 배달 음식으로 식사를 대신해도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딸아이도 아저씨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거스름돈이 조금 남으면 수고비로 드렸고, 시골에서 올라온 과일이 있으면 나눠 드리기도 했습니다.
길에서 배달 가시는 아저씨를 뵈면 저도 딸아이도 모두 반가워 인사를 했습니다.
몇 년 후 직장에서 야근을 하던 어느 날, 배가 고픈 동료들과 야식을 배달시켰습니다.
낯익은 얼굴이 배달 가방을 들고 들어오십니다. 서로 얼굴을 보는 순간, 어찌나 반갑던지요.
그간 안부를 묻게 되었고 아저씨께서 조그만 음식점을 개업하셨고, 오늘 제가 일하는 직장으로 배달까지 오셨다고 합니다. 동료들에게 “열심히 사십니다. 맛있게 드세요.”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으며 동료들에게 아저씨와 저와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날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 아저씨에게 받은 음식으로 저녁을 대신해도 딸아이에게 미안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아저씨가 배달해 주신 것은 음식만이 아닌 그 일을 통해 금전적 가치 이상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해 주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아저씨만 주실 수 있는 특별함이었습니다.
이직 후 재취업 상담을 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보람과 재미는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했던 일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가능한 일이었어요. 배우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별일 아니었고, 보람보다는 그냥 매일 바쁘고 반복적이었어요.”
사실 대부분의 일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 가능하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나는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나’라는 사람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기 때문에 그 시간, 그 장소, 그 일은 특별합니다.
그리고 내가 떠나지 않고 있는 그 장소, 그 순간, 그 일의 주인은 ‘나’입니다.
따라서 그 순간은 대체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나’의 일에서 ‘나’만의 특별함을 전달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청년취업컨설턴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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